우도 자전거 여행

2014년 여행일기.

작년에 우리 가족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갔었던 제주여행의 기록이다.


그 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현실을 잠깐 떠나있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다 잊어버리고 즐거워야 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는 것처럼, 그냥 지나가는 밤이라고. 무섭고 어두컴컴한 깊은 밤에도 꾸준히 움직이는 달을 보며 반드시 올 아침을 기다리는 것처럼 희망의 시작 같은 여행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편안한 휴식, 재충전을 컨셉으로 준비했으나 우리 가족은 여행지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지라 매일 부지런하고 알차게 돌아다녔다. 덕분에 나는 모자란 일정들을 급히 채워 넣기 위해 밤마다 끊임없이 검색해야 했다. 솔직히 말하면 계획했던 것보다 그렇게 구겨넣은 여행지가 훨씬 많았지만 신기할 정도로 즐거운 추억만 남았다. 항상 시간도 안 맞고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 여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10년 만이었다. 동생과 나만 2일 일찍 출발해서 사실 100% 함께한 여행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정도라도 감사해야 할만큼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다.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췄다. 전날 밤 10시 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던지라 눈꺼풀이 무겁다. 다시 자고 싶은 유혹이 너무도 컸지만 꾹꾹 눌러참고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섰다. 힘들었어도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일출 보러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어!' 라며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긴 마음이었다. 고민하는 바람에 약간 늦어버렸는데 바보같이 지갑까지 안 가져와서 다시 숙소로 뛰어갔다 왔다. 바닷바람이 상쾌해서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매표소 앞에는 우리처럼 일출을 보러온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대견함'은 금세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안도감'이 들어섰다. 깜깜한 새벽에 같이 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편해지긴 했다.

분명 6시 20분 쯤 해가 뜬다고 했는데 6시가 넘어가니까 환해진다. 늦을까 싶어 성큼성큼 뛰어서 올랐더니 13분 만에 주파해 버렸다. (도대체 성산 일출봉 갈 때마다 왜 그러는 건지! 예전에는 스쿠터에 키를 꽂아놓고 깜박하는 바람에 헐레벌떡 갔다 왔었다.) 정상에는 벌써 200명 쯤 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어서 허무하게 일출을 놓쳐버린 건가 싶었으나... 해돋이 광경을 떠올려보니 한 밤중에 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새벽 미명이어야 하는 것! 그러므로 아직 해는 안떴다. 제주도의 새벽은 섬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참 밝았을 뿐. 이제 편안하게 10분 후에 떠오를 해를 기다렸다. 날씨는 맑았으나 불안하게도 해돋이 방해꾼인 구름이 해수면 위에 낮게 깔려있었다. 역시나 예정된 일출 시간이 지나도 붉은 동그라미는 모습을 드러낼 기미가 없었다. 아! 갑자기 극도의 피곤함이 몰려왔다. 배고파서 컵라면 먹고 이불 속에서 좀 뒹굴어야겠다 싶어 후다닥 내려왔다. 일출 보러가자고 주장한 게 나라서 동생에게 참 미안했는데, 입구 근처에서 구름은 걷히고 해가 멋지게 떠오르는 모습을 발견했다. 뜻밖에 발견한 아름다움에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행이 힘들어도 미워할 수 없는게 이렇게 뜻밖의 경험이 엄청난 감동으로 밀려 들어오기 때문이 아닐까. 제주도가 처음인 동생에게 멋진 장면을 선사해 주고 싶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혼자서 하는 여행이 편했다. 싸우거나, 하다 못해 감정이 상할 일이 없으니까. 동생과의 소소한 첫 다툼은 우도의 숙소 때문이었는데, 나는 제주도 일정 때문에 이미 정신이 없는 상태라 우도에서의 숙소만 조사해줬으면 하고 부탁했었다. 동생은 몇 개 숙소를 골라왔는데 나는 그냥 단순히 숙박비가 저렴하는 멍청한 이유로 하고수동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해적 게스트하우스로 하라고 했다. 어디서든지 잠만 잘자면 된다는 생각에 안일했었다. 그렇지만 게스트하우스가 별로였다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게스트 하우스는 낭만 그 자체였다. 나무로 지어진 집도, 두목님도, 마당도, 침대도! 밤이 되면 더더욱! 다만 우도의 항구가 두 개 인지 몰랐던 것과 항구에서 게스트하우스로 갈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었다.

항구에서 귀동냥으로 얼핏 들은 바로는 태풍이 이제 잠잠해졌기 때문에 우도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던 배편 시간표는 전혀 쓸모가 없었을 정도로 배가 많았다. 휩쓸려서 표를 사고 휩쓸려서 천진항에 내렸다. 어쨌든 드디어 우도다! 이제 숙소로 빨리 가서 자전거를 탈 생각에 부풀었는데, 알고보니 숙소까지는 걸어갈 수 없는 거리였고 우도에는 택시가 없어서 한 시간에 한 대 있다는 마을버스를 타야 했다. 그 모든 사실을 알았을 때, 방금 우리 눈앞에서 떠나버린 그것이 관광버스가 아닌 마을버스임을 알았다. 9월 말인데도 날씨는 뜨겁고, 버스도 놓치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가격만 싸다고 다른 건 조사를 안하면 어떡하냐고, 그러면 언니는 왜 그냥 OK했냐고 투닥거렸다. 서로 자기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아니까 크게 싸우지는 못하고 카페에 들어가서 베스트원 같은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서로에게 다정하지 못한 무뚝뚝한 자매지만 먹을 거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쉽게 하하호호히히 모드로 돌아간다.





우도처럼 작은 섬을 돌아볼 때에는 자전거만큼 좋은 교통수단이 있을까. 동생이 자전거를 타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고 2007년에 대학교 친구들하고 우도 한 바퀴를 자전거로 돌았던 기억이 너무나 좋아서 이번 여행 일정에 넣었다. 그때가 1박 2일이 막 처음 시작할 쯤이었나, 아무튼 여행 버라이어티라는 장르가 생소한 시절이라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우도는 관광객도 그다지 많지 않은 조용한 섬이었다. 셋이서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갔던 우리의 모습,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할 즈음에 우도봉 근처의 작은 슈퍼마켓에서 만난 귀여운 강아지가 문득 생각날 때가 있다. 나는 그런 몇몇의 기억들을 청춘냄새라고 부른다.

참, 그런데 그 땐 쉽게 돌았던 것 같은데 오르막이 이렇게 많았었나 깜짝 놀랐다. 기억이 미화된 것인가, 아니면 체력이 떨어진 것인가! (설마 땅이 융기한 것은 아니겠지) 둘 다 맞겠지만 정말 당황했다. 스쿠터와 ATV 를 탄 사람들은 계속 우리를 지나쳐 갔는데 오르막이 심한 곳에서는 너무 부러웠다고 솔직히 고백해본다. 그래도 나는 나의 양 다리에 힘을 실어서 움직이는 것이 더 낭만적이라고 생각해서 다음에 가도 자전거를 타겠지만. 앞으로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지나가는 순간은 너무 아쉽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통과할 때면 등에 얹어진 모든 짐들은 사라지고 나는 가벼워졌다.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이 갑작스레 졸음이 켜켜이 쌓인 눈꺼풀처럼 엄청 무거워질 때면 문득 우도에서의 자전거 라이딩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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