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무한정 외치는 오늘날의 성과사회는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을 앓고 있다. 성과 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열심히 노동을 한다. 이것은 자유롭게 보이지만,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하는 강제일 뿐이다. 인간은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자기자신을 착취한다. 이러한 노동 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므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이로써 지배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니체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영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활동 과잉은 아무 저항없는 과잉 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 이로써 '하지 않을 수 있는' 주체적인 부정적 힘은 사라지고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진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외부의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더욱 주체적으로 조정함으로서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폭력은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 성과를 향한 압박은 탈진 우울증, 소진 증후군으로 이어진다. 이런 질병들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자기 자신을 뛰어 넘지 못한 자들은 스스로를 무능한 낙오자로 여기며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힘을 잃어버린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버려 두는, 무위의 피로를 내세운다. 이것은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무기력한 피로와는 구별된다. 무위를 통해 영감을 불어넣어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그 시간은 느리고 평화로우며 특별한 시각을 불러 일으킨다. 흩어져 있는 개개인을 연결시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공동체로 만든다. 사람들은 자신의 피로를 내려놓고 피로를 나눈다. 


성과사회에 사는 한, 개인은 여러 개의 가면을 필요로 한다. 개인이나 사생활이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시대를 지나, 명령대로만 노동하는 어떤 감정도 불필요한 강제적인 규율사회도 지나갔다. 성과사회 속 개인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초 긍정적 존재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과사회의 개인은 이렇게 외친다. '내가 이걸 해낼 줄이야!' 라고. 그 순간은 짜릿하고 흥분되고 자기자신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다. 하지만 가면 속 개인은 우울하다. 성과의 기쁨은 곧 더 커다란 부담감이 되어 개인을 짓누른다. 성과가 증가할수록 착취되어가는 자신을 감추고 늘어나는 역할에 대응하기 위해 가면은 더욱 많아진다. 계속해서 가면을 바꿔쓰다가 진짜 내 모습을 잃어버리고 더더욱 성과사회에 어울리는 유연한 사람이 된다. 소비하고 인스턴트적이며 끊임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사람. 그리고 겁도 좀 많고. 

이제 삶도 성과가 된다. SNS의 팔로워/팔로잉 숫자와 좋아요/하트는 개인을 중독시키며 자기 착취로 나아간다. 가끔 잠수를 타면서 부정적 힘을 발휘해보기도 하지만 사실은 관심을 끄려는 성과지향의 행위일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성과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해하고들 산다. 아주 사소한 뉴스라도 알지 못하면 뒤쳐졌다고 생각한다. 피로하다. 내려놓아야겠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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