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림 라시드와 X-ray


학교 '과제'를 수행하려고 정말 오랫만에 미술관에 갔다. 요즘은 연구란 것을 한답시고 붙잡고 있는데, 진도는 나가지 않고 고구마 100개를 삼킨 것만 같다. 괜히 스트레스만 쌓이고 소화도 잘 안된다. 어떤 것에 몰두하려고 해도 연구에 관한 생각에 집중력이 자꾸 도망갔다. 미술관에 가면서도 마음의 여유가 없다보니 온전히 관람에 집중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과제 때문이라지만 나름대로 시간을 쪼개서 왔는데, 뭔가를 얻어가야 하지 않겠냐는 괜한 압박감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지금은 예술을 즐기기에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전혀 적합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순수미술보다는 그래도 좀더 직관적인 디자인 전시를 선택했다. 나이가 들면 나의 현재 상태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발달한다던데, 정말 그런가 보다.


파리바게뜨 물병하면 아! 하고 떠오르는, 카림 라시드는 그 유명한 물병을 디자인한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는 쓰레기통(가르보)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가르보에 대한 영상을 보면, 누구든지 그의 놀라운 디자인 철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오디오 가이드는 하나도 기억이 안나는데 나에게는 그 영상만으로도 충분했다. 단순히 예쁘고 있어보이게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니었다(물론 예쁜 제품도 많다). 그는 쓰레기통을 제대로 사용해보고 이해한 것 같다. 가르보의 컨셉은 농구 골대에 골을 넣는 기분을 느끼게 하려고 했다는데, 입구가 넓게 빠져서 적중률도 높다. 쓰레기통을 옮기거나 비울 때 손에 쓰레기가 닿지 않도록 언덕처럼 디자인된 손잡이도 센스가 넘친다. 게다가 완벽하게 재활용이 가능한 플라스틱 소재로 만들었다. 물건의 존재 목적에 아름다움과 더 나은 사용성을 부여하는 그의 재능은 정말 부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결국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라는.. FOMO(Fear Of Missing Out)스러운 생각 때문에 X-ray 전시회까지 보고 왔다. 이 더운 여름날, 손풍기가 없었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정이었다. 오랫만에 꽉 채운 것 같은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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