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적 의료혁신


의료 분야는 생명을 다루는 매우 특수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특권처럼 적용되기도 했다. 일단 시장경제 논리가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병원이 아주 많이 늘어난다고 해서 진료비 경쟁이라든가 사업 모델의 혁신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으며,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기술 발전 속도도 느린 편이다. 그러나 병원의 입장에서 봤을 때 특권이라고 하기엔 조금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꽤나 높은 간접비 때문에 수익률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 클레이튼 교수는 이토록 별난 의료산업에 자신이 연구한 혁신의 관점을 적용할 수 있는지 10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보건의료비를 적정 수준으로 낮추고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그들은 보건의료산업을 개념적으로 철저히 분해하고 재구성하였다.


몇 년 전 건강보험이 민영화된다는 소문이 파다했을 때, 미국에서는 잘린 손가락을 치료할 돈이 없어서 봉합 수술을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괴담처럼 떠돌아다녔었다. 이 책은 보험 없이 병원에 갔다가는 가정이 풍비박산 난다는 미국 의료환경을 배경으로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참고할 부분이 존재한다. 먼저 의료비 지출 속도가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속도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은 의료비를 부담하느라 제품 가격이 상승할 것이며, 건강보험재정은 빠르게 악화될 것이다. 주범은 만성질환, 그리고 행위별수가제다. 병원에서 진료행위를 많이 할수록 수익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의료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극대화된 분야라 환자는 의사의 말을 거부할 수 없다. 과잉진료에 대한 의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에도 의사가 지시한대로 일단 검사를 받는다. 그런데 병원을 바꾸면 검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진료기록을 원내에서만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위별수가제가 반드시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다.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3가지 파괴적 사업 모델을 제시하였다.


1) Solution Shops

병을 확진하기 위해서는 초음파도 해보고 내시경도 해보고 MRI도 찍어보든지 해야 할 때가 있다. 즉, 전문의 집단의 도움으로 병을 진단하고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가설검증의 순환 과정을 반복한다. 전문가의 직관, 경험, 분석능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행위별 수가제를 적용하게 된다.


2) Value-Adding Process Businesses (가치부가과정 사업)

불완전한 것들을 더 완전한 산출물로 바꾸는 것이다. 진단 후, 일정한 Process를 갖춘 의학적 절차 활동이다. 탈장 교정술, 혈관성형술, 레이저를 이용하는 안과 수술 등이 해당된다. Process를 갖췄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면 결과(치료)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별 수가제 적용이 가능하며 Solution shop이 분리됨으로써 간접비는 떨어진다.


3) Facilitated Networks (촉진 네트워크)

사람들이 서로 교환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사업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SNS 플랫폼과 같은 것이다. 플랫폼은 정액제로 운영된다. 환자들이 자신과 동일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만성질환 관리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야하는 행동의존적 만성질환에 적합한 사업모델이다. 


위와 같은 사업모델을 적용하기에 앞서 '기술적 촉진 요인'이 필요하다. 기술의 발달로 수많은 질병들은 직관의학 → 경험의학 → 정밀의학의 단계로 옮겨가고 있다. 각각의 단계로 나아갈수록 치료방법은 표준화된다. 직관의학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다면 치료 과정도 계속 가설검증의 순환이 이루어져야 하므로 Solution Shop 이상으로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질병들이 정밀의학의 영역으로 이동하였으므로 환자는 예측 가능하고 낮아진 비용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사업모델은 해결하고자 하는 일에 따라 분리되고 또 합리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정액제(통합형 인두제)에 기반한 통합형 의료공급 조직은 환자의 건강을 유지시킴으로써 수익을 내고, 환자에 따라 Solution Shops, VAP 클리닉, 네트워크 촉진 시스템으로 적절히 보낸다. 앞서 말한 세가지 사업모델이 종합병원으로 존재할 때에는 서비스 비용을 올바르게 산출해 내기 어려워 행위별 수가제로 가격을 결정하였지만, 나누어졌을 때는 각각의 가치 산출이 용이해지기 때문에 의료비 통제가 가능해질 것이다. 만약 당장 보건의료시스템에 인두제를 도입하면 어떻게 될까? 이미 했었지만 결국 1998년에 폐지되었다고 한다.


이제, 파괴적 사업모델을 둘러싼 '가치 네트워크(상업적 생태계)'가 형성되어야 할 차례이다. 파괴적 혁신은 기존의 가치 네트워크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기존의 가치 네트워크는 급성질환의 진단 및 치료에 적합하게 설계되어 건강 관리나 예방, 만성질환 관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보건의료 시스템의 존속적 변화로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내기는 정말로 어려울 것 같다. 가치 네트워크의 파괴적 혁신은 스마트폰의 그것처럼 멋져보이지는 않겠지만 실제로는 의료 정보의 연동성 강화, 관련 규제 완화, 신생 기업의 참여 발판 마련, 심리적 저항 등 생태계를 풍부하게 만들어나가기 위해 훨씬 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읽었던 내용 중 가장 인상깊었던 챕터가 '만성질환 관리의 파괴적 혁신'이다. 의학의 발전으로 죽을 뻔한 사람들이 관리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만성질환은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증상을 완화시킴으로써 생명을 좀 더 연장하는 것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낸다면 현재의 만성질환은 다시 치료 가능한 급성질환의 영역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수많은 질병이 만성질환 형태로 남아있다. 책에서는 결과의 즉시 나타나는지 여부, 행동/기술의존성 질환으로 만성질환을 분류하였는데 각각의 사분면에 따라 사업모델을 제시하였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 행동의존성 질환이었는데 이들에게는 건강 관리 동인이 확실히 부족했다. 마치 여자들이 다이어트 할 때 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병원을 계속 방문하느라 의료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환자들은 건강보다 경제적 형편을 더욱 신경썼다. 저자는 바로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 건강관리가 재정적 이점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원서가 출간된지 벌써 8년 정도 되었다. 과거의 사람이 현재를 예측하였을 때, 그것이 얼마나 맞아 떨어지는가 확인하는 것은 흥미롭다. 미국의 변화는 아직 저자가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닐 것 같지만 놀랍게도 책에서 예측한 방향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요즘 들어 Deep Learning,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라는 단어들이 모든 분야에서 굉장히 자주 언급되고 있으며 저자 역시 비슷한 개념에 대해 서술했다. 이세돌이 알파고와 바둑 대국을 하는 것처럼, 의사들도 컴퓨터와 병변 찾아내기 대결을 펼칠 것이고 컴퓨터가 인간보다 정확하게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렇지만 책 뒷부분에 언급된 제약산업, 규제, 보험, 의과 대학은 수 십년 전 상황에 맞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바꾸어야 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병원은 환자가 아파야만 돈을 벌 수 있고 예방 및 관리 측면에서는 재정적 이익이 미미하다. 미국의 FDA 규제는 세계에서 제일 까다롭다. 또한 간호사와 일차진료의사의 부족으로 그 자리를 이민자들로 채우고 있으며 신약 연구개발의 비용은 올라가지만 실제 출시된 의약품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빠르겠지만 의료업계의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과 이를 둘러싼 규제, 산업, 프로세스가 얼마나 빠르게 쫓아올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저자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상황에서만 협력을 촉진시킬 뿐, 변화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적극적인 협력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그러나 만성질환, 고령화, 기술의 발전 등 결국 보건의료계를 변화시킬만한 촉진 요인은 충분히 있으니 기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이미지 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