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사람


사촌오빠가 대학로에서 판소리 공연을 한다길래 칠리와 함께 갔다. 사실 사촌오빠와 나는 20년 가까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였는데, 요새는 집안에 대소사가 많아져서 가끔씩 연락을 주고 받게 되었다. 칠리는 우리 부모님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 기껏해야 집 앞에서 나를 바래다줄 때 딱 한 번 어둠 속에서 어색한 인사를 했던 것이 전부. 그런데 처음 소개시키는 가족이 그동안 왕래가 없었던 사촌오빠라니 좀 이상하긴 하다.


'눈 먼 사람'은 심학규의 시선에서 심학규란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작품이었다. 요즘 떠오르는 소리꾼이라는 김봉영 씨가 어찌나 맛깔스럽게 잘하시던지! 대사를 하거나 관객들과 대화 할 때에는 놀라운 순발력과 능수능란한 애드립을 펼쳐보였고, 판소리를 하며 감정이 고조될 때는 마치 1인 뮤지컬을 보는 듯 했다. 목소리 뿐 아니라, 표정, 몸짓 하나 배우와 다를 바 없었다. 극장안 관객들 모두 그의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내용은 약간 현대적으로 각색되었지만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갑자기 이해할 수 없었다. 심청이가 연꽃 안에서 다시 살아나 황후가 되었고 맹인들을 위한 잔치를 열었다. 청이를 만난 심학규가 놀라서 눈을 뜨고 모든 사람들이 연달아 눈을 뜨니 끝으로 치닫으면서 극은 점점 고조되어 가는데 정작 심학규는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이야기가 끝이라며 집으로 돌아가라 한다. 현실이 아닌 꿈이었던 것. 비극적인 결말로 끝났을 때에야 알았다. 

참으로 이기적인 아버지였고, 나약했던 아버지. 세상 물정도 모르고 사기나 당하는 고지식한 사람. 어렸을 때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조금 이해해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아기공룡둘리를 보고 고길동을 안쓰러워하면 나이가 먹은거라고 했다. 좋은 뜻으로는 철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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